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도연맹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학살의 종결 === 1950년 내내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학살을 멈춘 것은 미국의 압력도, 정부의 변심도 아닌 1950년 가을부터 시작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바로 "항미원조" 라는 명분을 앞세워 전쟁에 개입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었다.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온 이래 10월 말의 제1차 공세를 시작으로 이듬해 4월말의 제5차 공세(중공군 춘계공세)에 이르기까지 중공군은 매번의 공세마다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국군 및 유엔군과 격돌했고 한때는 수도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빼앗겼다가 되찾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막대한 인구 수를 바탕으로 대규모 병력을 쏟아내다시피 하는 중공군은 전쟁 초반에 밀어붙이는 듯 싶다가 반격 한 번에 지리멸렬해진 인민군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당연히 이를 막아내는 국군의 소모율도 급증했으며 정부는 "이대로 가다가는 중공군한테 밀려 모두 죽는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유엔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와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의 지도 아래 국군의 대규모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중공군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국군의 대규모 확충 역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장 최전방에서 병사들이 떼거지로 죽어나가는데 후방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짓은 말그대로 헛짓거리였고 좌익 "빨갱이"든 우익 "애국청년단"이든 간에 똑같이 최전방으로 끌려가 소모되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1951년 초부터는 자연스럽게 학살이 끝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